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2년차, 집에 있다가 갑자기 불안해지다

슬기엄마 2011. 2. 27. 22:53

2년차, 집에 있다가 갑자기 불안해지다

 

3 1, 나는 2년차가 되었다. ‘2년차가 되면 정말 좋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어 왔지만, 정작 나는 뭐가 좋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더욱이 과연 내가 2년차의 자격이 있기는 한 건지 자신감이 없는지라, 솔직히 변화를 느끼기 힘들다. 당직 일수가 좀 줄었고, 나에게 잔소리하는 사람이 줄었고, 여기 저기 감시의 시선을 덜 느끼게 된다는 점은 2년차가 되어 느끼게 되는 자유로움이지만, 그 외의 것들은 아직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새로운 출발의 발목을 잡는 여러 요인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퇴원요약지와 미비기록 정리인 것 같다. 환자가 퇴원하는 당일 혹은 그 다음날에 퇴원요약지가 정리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오전 회진 후 퇴원 오더를 내고 오전 중에 환자 퇴원시키는 것으로도 허덕이는 판에 퇴원요약지까지 제때 정리하는 일은 나에겐 거의 드문 일이었다(똑부러지게 일 잘하는 동료들은 그렇게 야무지게 일처리를 하기도 한다. 정말 존경스럽다). Routine chemotherapy를 받는 환자들의 퇴원요약지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재원기간 중에 특별한 event가 있었으며, 그 일을 어떻게 management 했는지 요약하고, 그 환자가 다음에 입원했을 때 해야 하는 검사는 무엇인지, 무슨 문제가 있으니 약 처방이나 다른 과 협진을 고려하라는 등의 멘트를 남겨야 하는 환자들은 제때 퇴원요약지를 정리하지 못하고 미루다가 시간이 날 때 조금씩 정리하게 된다. 사실은내일 외래 방문일이니 누구 누구 discharge summary 정리해 주세요라는 외래 간호사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외래 내원 전날 밤에 정리하는 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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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요약지를 보다가 아뿔싸!


그렇게 퇴원요약지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예전 order도 다시 열어보고, 해당 환자의 검사 결과도 다시 종합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내가 무슨 검사를 빠뜨렸는지, 퇴원약으로 무슨 약을 추가해 줬어야 하는지, 다음 입원 전에 어떤 검사를 꼭 하고 입원해야 하는지, 제 날짜에 입원장을 주기는 한 건지 등등을 확인할 수 있다. 때로는 주치의로서 했어야 하는 일들에 펑크가 나 있음도 발견하게 된다. 아뿔싸, 이마에 땀이 흐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방에 사는 환자에게 전화해서 미리 서울에 올라와 CT를 찍고 입원을 해야 하니 예정보다 일찍 오시라는 둥, CT방에 연락해서 ○○○ 환자가 오면 무조건 찍어달라고 으름장 반, 사정 반으로 통보한다. 약이 빠진 환자가 발견되면 급한 마음에 내 돈으로 약을 사 둔 다음 병원에 오게 해서 약을 건네주기도 하고-열이 있어 IV antibiotics를 쓰던 환자에게 PO antibiotics를 주지 않고 퇴원시켰던 바로 그 환자, 너무 당황해서 처방전을 주는 것만으로는 내 마음이 너무 불안하여- 원무과에 전화해서 입원일을 바꿔달라고 하는 것 정도는 가벼운 episode일 뿐.

가장 심각한 것은 퇴원요약지를 정리하다 보면 그제서야 환자가 제대로 파악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사실이다. 검사 결과를 정리하고 예전 결과와 비교하다 보면, 이 환자에게 이런 문제가 있었구나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종양학과에서 일할 때는 내가 일하던 두달여 동안 3번 정도 입원하는 환자 그룹이 있었는데, 그들이 퇴원한 뒤 뒤늦게 통탄하며 그 환자의 상태를 파악했던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워, 그들이 다시 입원하면 정말 잘해주고 싶었고 실제로 잘해줄 수 있었다. 좋은 의사란 친절한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처치가 제때에 적절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예측하고 준비하는 의사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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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비기록을 정리하다가 또 아뿔싸!


미비기록을 정리하다 보면 과거의 내가 보았던 환자들에 대한 통탄할만한 나의 실수들이 더욱 더 잘 드러난다. 신기하게도 이름을 보면 어떤 환자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급한 마음으로 내가 갈겨 적었던 transfer out note, ICU admission note를 보는 순간, 땀 흘리고 애타하며 그 환자를 봤던 시간들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10cm가 넘는 두께의 종이 차트를 넘기며 내가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progress note를 적고 thoracentesis note를 메우고 마지막 퇴원요약지는 사망으로 기록된 그 환자의 차트를 다시 한번 보고 나면,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많은 것을 반성하게 된다.

의무기록을 성실하게 작성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아마 내 생활의 24시간 모두를 병원에서 지낸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인턴 때는 근무시간이 끝나면 counter에게 call을 넘기고 가버리면 만사형통이었지만, 그렇게 퇴근하는 길에 올려다보는 교수님 연구실들은 모두 불을 밝히고 있었다. 특히 임용된 지 몇 년 안되는 젊은 선생님들은 아마 출퇴근이 의미가 없을 만큼 병원과 학교에서 일상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투자한 만큼 보람과 성과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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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 오프인 나는 저녁이 되자 집에 갈까, 아니면 남아서 progress note와 밀린 퇴원요약지를 정리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집에 가기로 했다. 벌써 3학년이 된 슬기와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는가. 또한 나에게 일말의 에너지가 남아있을 때 충전하지 않으면 완전히 소모되어 미처 충전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허덕거리지 않겠는가. 나는 할 일들을 남겨둔 채 병원을 나섰다.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매일 살아간다면 항상 일이 깨끗하게 마무리되지 못하고 마감에 임박하여 쫓기듯 일을 하는 형태로 시간이 흘러가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나는 늘 뭔가를 하고 있기는 한데 항상 마음이 다급하고 정리되지 않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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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나 스스로에게 미비정리기간을 선포하고 밀린 의무기록을 정리하며 밀린 짐을 덜어야겠다. 잘못된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환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미래의 일, disease progression을 예측하며 준비된 자세로 환자를 볼 줄 알아야 2년차답지 않을까 싶다. 어떤 선생님으로부터중환을 보는 것이 한템포 늦는 것 같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다시 그런 지적을 받으면 안될 텐데
….

야심찬 고민과 행복한 망상


밤에 당직으로 수없이 울려대는 call로부터는 조금 자유로워졌지만 실제 내가 감당하는 책임의 몫은 더 커졌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책임감이 커지는 위치로 변해갈 텐데, 아는 것 없이 책임감에 짓눌리기만 하는 소심한 의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진다. 내일 아침은 새벽같이 집을 나서야겠다는 초조함이 생기는 것 같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되 과거의 과오로부터는 자유롭고 미래를 진취적으로 준비하는 건강한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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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년차 때 한창 힘들고 일하는 것이 지겨울 때는 3년뒤 내 모습을 떠 올리며 그때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상상했었다. 내가 4년차를 마칠 무렵이면 지금보다도 더 나이를 먹어서, 사회적으로도 참 애매한 나이가 되어 어딘가 자리를 잡기에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을 것 같다는 걱정,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공부와 일의 영역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때이른(!) 전망에 대한 고민, 완성하지 못한 박사학위 논문은 언제쯤 써야 할지, 주제를 내심 정해 놓은 것이 있는데 바꿔볼까 하는 생각, field study를 위해 지금부터 아예 내가 설정해 놓은 field에서 일을 시작해 볼까, 이제 어엿한 내과 의사인데 주말에는 적절한 곳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정도의 사회적 의무를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정식 의료 지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소외 공간은 어디일까, 등등의 야심찬 고민을 하며 잠시 망상 속의 행복을 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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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때의 망상들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 시작되었는데, 언제까지 과거에 끌려다니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겠지. 조금 부족한 것은 동기부여. drive를 찾기만 하면 멋진 2년차로 생활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