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친절에 대한 양가 감정

슬기엄마 2011. 2. 27. 22:45

친절에 대한 양가 감정

 

내 이력이 좀 다양하다 보니, 친구들도 다방면에 걸쳐 있다. 학부 친구들은 선생님이 많고, 학보사 친구들은 언론 쪽에 많고, 사회학과 대학원 친구들은 탁월한 분석력으로 여러 곳에 퍼져 있다. 그들 그룹에서 뛰쳐나와 의사가 된 나는 그들과 아주아주 가끔 만난다. 나는 병원 이야기 말고 바깥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나이드신 부모님 때문에 병원 출입이 잦아진 그들은뭐니뭐니 해도 의사는 친절하고 설명을 잘 해줘야 한다고 나에게 충고한다. 그들의 말이 백번 옳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 울컥 치미는 뭔가가 있다.

40
명이 넘는 환자의 주치의로 일하는 한 동기는 오전 내내 보호자와 보험회사 직원과 통화를 번갈아 하며 실갱이를 벌이고 있다. ‘그건 난소의 악성 종양이기는 하지만 난소암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code ***.**을 붙여 진단서를 발급할 수는 없습니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지만, 보호자는 전화기를 계속 붙잡고 있나 보다. ‘정 그러시면 보험회사 직원과 직접 통화를 하겠습니다’, ‘이 환자분은 위암의 난소 전이에요. 난소에 악성종양이 있다고 해서 난소암은 아니므로, code를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보험회사 규정을 제가 다 알 수는 없으니 그쪽 자문하시는 분과 상의하시죠
.’

그 친구는 결국 오전에 냈어야 했던 다른 환자의 항암제 order를 늦게 냈고, 오전에 했어야 할 여러 급한 일들을 오후가 되어서야 처리하러 뛰어다니고 있었다
.

이렇게 보험 문제에 시달리며 여기저기 전화하고 보호자 설명하는라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남은 수십 명의 항암제가 오후 늦게 환자에게 연결되고, 환자들은 이뇨제 때문에 밤새 화장실을 왔다갔다 하게 되고, 그날 오전에 진행되지 못한 스케줄이 다음날로 미뤄지는 바람에 화가 난 다른 환자들이 항의를 한다
.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암보험이 많아지면서 퇴원시 보험회사용 진단서를 요구하는 환자들이 많아졌다. 중심정맥 삽입시술은 언제 했으며,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슨 치료가 진행되었는지 상세히 써달라는 요구가 많다. 기술되는 항목에 따라 환자에게 지불되는 보험금이 달라지고 혜택의 폭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해당 질환으로 언제 언제 외래에 왔었는지를 모두 기록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는 눈앞이 캄캄하다. 투병기간이 긴 암환자들이 언제 외래에 왔고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 다 찾아서 써주려면 한나절 내가 할 일은 모두 펑크가 나기 때문이다
.

퇴원 처방을 다 내놓고 다른 일을 하느라 여기 저기 뛰어다니고 있는데 병동에서 전화가 온다. ‘옷 다 갈아입은 환자가 진단서를 요구한다는 전화다. 기차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빨리 해달라는 독촉과 함께. 만성 질환으로 투병중인 환자에게 보험금 지급 문제는 치료 못지 않게 중요할 수 있겠지만, 그럴 때는 솔직한 심정으로 욕이 나온다
.

환자는 당연히 의사의 설명을 듣고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의사는 당연히 설명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데, 이런 기본적인 일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환자들이 의사를 불신한다는 비의료인 친구들의 분석을 들으면, 내가 항변하고 싶은 것들도 많아진다. 나는겉으로 보이는 친절보다는 환자를 위해 꼭 진행되어야 하는 치료가 제때 적절히 시행되는 것이 의사로서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모두는네가 의사가 다 되었구나라며 내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 눈치다
.

내가 의료사회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도 병원을 오가며 내가 느꼈던 불만, 의사에 대한 실망과 분노 등 아주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분석을 백분 이해할 수 있다. 그들 또한 내가 단지 의사의 입장에서 항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 나 사이에도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이 생기고, 결국에는그래도 의사는 친절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명제로 대화가 종결된다
.

물론이다. 의사는 친절해야지. 환자에게 친절할 수 있으려면 나에게 친절을 위해 할당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환자 진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잡무가 끼어들면 안된다. 원무과, 보험심사과, 상황실, 외래 접수처 등과 내가 통화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왔다갔다하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내 환자를 위해 할당해야 하는 시간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

지방에서 환자의 먼 친척이 달려와서 환자의 상태를 설명해 달라고 한다. 환자 상태가 좋지 않을수록 추궁하는 듯한 이들의 질문은 많아진다. 나는 이미 다른 가족들에게 다 설명한 바 있고 설명할 때 관련된 가족들은 다 와달라고 부탁했건만, 내가 설명을 소홀히 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면 인상이 불그락푸르락해진다. 하루에 몇 차례 이런 보호자들과 실갱이를 벌이고 나면 일할 맛이 딱 떨어진다
.

4
년전 학생 실습 때, 한 보호자가 오후 회진을 돌고 나오는 우리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저희 어머님이 이번에 처음 암을 진단받으셨는데요, 항암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시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며. 그때 4년차 선생님은항암치료 안 받을거면 왜 입원하셨어요?”라며 쏘아붙이고 방을 나와 버렸다. 나는 그때 충격을 받았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얘기할 수 있나? 보호자는 의사가 잘 설득해서 항암치료를 받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그렇게 표현한 것 아니었나?’라 생각하며, 그 레지던트에 대해 참으로 실망한 적이 있다
.

물론 지금 생각에도 그 선생님의 대답은 냉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심정만은 이해가 된다. 환자와 가족들에게 의사의 한마디 한마디는 가슴에 비수가 될 수 있지만, 의사도 그렇게 척박하게 일하다보면, 그래서 진료를 위해 온전히 나의 능력을 다 쓰지 못하고 보험회사와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통화하고 보험 항목을 충족시키기 위해 진단서를 쓰는 것에 시간을 왕창 쏟아붓고 난 다음에는, 환자 만나기가 싫어진다
.

교수가 사령관이면 레지던트는 소대장쯤 된다고 누가 그랬다. 소대장이면 상당히 권한을 갖고 많은 일에 책임을 지는 자리임과 동시에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수행해야 하는 중간자적 지위지만, 그 지위를 너무 낮추는 자책은 하고 싶지 않다. 우리 의료 현실에서 우아하고 고상하게 환자 보는 일만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행정 시스템과 지원 부서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이발로 뛰는전공의에게 넘겨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표면적으로 불친절한 의사상으로 비춰지고 있다. 이는 의사의 사회적 지위를 떨어뜨리는 작용을 함과 동시에, 본업보다 부업에 지친 의사의 자긍심도 떨어뜨린다
.

엊그제 1년차의 마지막 term으로 종양내과에 배치되었다. 40명이 넘는 환자를 하루 이틀 사이에 파악하는 일은 정말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작업이다. 전임자가 꼼꼼하게 작성해준 off service note를 읽으며, 생각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전신적으로 전이된 암으로 몇 년째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진단, 재발, 항암, 수술, 방사선, 항암 등의 치료가 반복되며 오늘까지 버텨온 그들에게 한편으로 경외심을 느낀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치료를 받고 자신에게 남은 기간을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드려는 환자들을 만날 때면, 나는 정말 그들을 위한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

그러나 내가 일하는 바로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그런 환자들의 보험회사용 진단서를 쓰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지 않은가! 나는 민간보험회사에서 요구하는 이런 일들을 왜 의사가 진료시간을 뺏겨가며 해 주어야 하는지 정말 화가 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런 문제의 개선을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창구를 통해 건의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알아볼 시간도 없다. 그리고 이런 일 때문에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환자들에게 불친절하게 했다가 두 배로 나쁜 소리를 듣는다
.

그래서, 무조건 의사의 친절함을 강조하는 누군가에게는 억울한 심정이 들고, 친절할 만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지금의 현실로 인해 막연한사회불만세력이 되는 것만 같다. 어디서 악순환의 탈출구를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