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2 - Transition 2014-2015/가운을 벗고 사회로 나오다 0.5

일상을 다시 시작하다

슬기엄마 2014. 5. 6. 23:31


일면식이 없는 

한 선생님의 메시지를 받고

블로그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요?


 

컴맹인 제가 

블로그 초기 화면을 Reset 했습니다. 

예전 블로그는 '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책과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때는 청년의사 양광모 선생님이 다 만들어주셨지요. 예쁘게 편집도 잘 해주셨구요. 



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는 

제가 Fellow 1년차였던 2009년 한해 동안 

유방암 항암치료 수술 방사선치료를 받았던 후배 박경희와 함께 쓴 글을 모아

2010년 6월에 출간한 책입니다. 



책을 쓰기로 결심했던 시점에는 

내과 의국 후배인 경희가 병에 굴하지 않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였지만 

정작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경희와 비슷하게 유방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을 위한 교육용자료로 쓰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거치며 

종양내과를 평생 전공으로 하겠다고 결심했던 나도

유방암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임상조교수가 되고 나서 제일 처음 한 일이 

이 블로그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환자들은 언제나 의사의 설명에 목말라 하는데 

의사인 나는 늘 비슷한 설명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환자들에게 체계적인 설명을 하고 정보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진료실에서 부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적절한 공간으로 블로그를 떠올렸습니다. 

젊은 여자 환자들이 대다수인 유방암 환자들에게 썩 괜찮은 수단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실재로 썩 괜찮은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블로그를 통해 환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실재로 친해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3년 동안 

참으로 열심히 블로그에 글을 써 왔습니다.

그렇게 글을 쓸 시간에 논문을 썼으면 얼마나 더 썼을텐데 안타까와 하시는 교수님도 있었고 

환자들과 너무 밀접하게 지내면 감정적으로 더 힘드니까 거리를 유지하는게 좋다고 충고해 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다 맞는 말씀이지만,

사실 저는 블로그에 글을 쓰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환자들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고 힘들지도 않지요. 

그래서 전 새벽 1시 2시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블로그에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2월까지 근무를 마치고 저는 병원을 떠났습니다. 

가운을 벗고 사회를 만난 나는 

다시 애송이가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적 방학이 되어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가면  

엄마한테 잔소리 안듣고 마음껏 놀 수 있다며 엄청 좋아라하지만 

뉘엇뉘엇 저녁해가 질 무렵이면 

마음이 울먹울먹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나도 저녁이 되면 환자들 생각이 나서 마음이 울먹울먹 했습니다. 



내 삶의 모든 중심축에는 환자가 있었는데 

그 축이 변한 지금의 나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답을 내리는데 자신이 없어 

블로그에 아무것도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환자들에게 문자가 와도

답장을 잘 못합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 말도 하기 싫었습니다.

아무 글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 의욕도 없었습니다. 



아주 서툴게 

블로그 스킨을 바꿔봅니다. 

영 볼품이 없습니다. 

제목도 '한쪽 가슴으로 사랑하기'에서 'MOVE ON'으로 바꿔봤습니다. 

타이틀 디자인이 영 별로라 동생에게 하나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참입니다. 


MOVE ON 

여러가지 뜻이 가능하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MOVE ON 은 

문제가 좀 있지만 그냥 가는 것입니다. 해결하는 것이죠. 인생은 그렇게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자 어서 달려라 

그런 의미의 MOVE ON 입니다.

나의 과거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묻어버릴만큼 잘못한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과거를 다 부정하기 보다는, 어느 정도는 털어버리고 어느 정도는 껴안고 나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예전에 블로그에 글을 쓸 때는

항상 나의 환자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는데

이제 난 누구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게 될까요? 

천천히

조심스럽게 고민하면서

나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 봅니다. 




오늘은

나름으로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시작했다는 것에 스스로를 칭찬해주려고 합니다.



이정원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