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 하루는 선물

슬기엄마 2013. 12. 31. 21:54


최선을 다해 살지만

그리고 지금 내가 그렇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조건에 처해 있다는게 다행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허탈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외롭고 고독하다. 

나?

아니 우리 모두!


우리 마음 속에는

내가 절대적으로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느끼기 보다는

남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더 느끼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비록 상황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누구보다는 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기 쉽상이다.

그래서 때론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해버리게 된다. 

무의식중에 내 뱉은 나의 한마디 말로 그 누군가는 엄청나게 상처를 받는다. 

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산다. 



지금 나에게 입원해 있는 환자들 중 대부분이

호스피스 환자이다. 

의사로서 의학적인 도움을 주기 어려운 상태이다. 증상 조절만 하고 있다.

환자를 퇴원시키거나 전원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힘들다. 



 

제일 가슴아픈 건 

착한 S.

나는 이제 환자 이름을 부른다. 

누구야, 오늘은 좀 어때? 잠 잘 잤어? 

처음에는 S 씨 혹은 S 환자 그렇게 불렀는데

이제 동생같이 그냥 이름을 부른다. 

환자의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하는 건 처음이다.


아무것도 못 먹는 S.

세달째 콧줄을 끼우고 있다. 

객관적으로 항암치료를 할 컨디션이 아닌데 목숨걸고 항암치료를 해보기로 했다. 

병 진단받고 항암치료를 한번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죽기만을 기다리기엔 너무 억울했다. 

제 용량도 아닌 weekly cisplatin. 

3주 동안 세번 항암치료를 했다. 첫 항암치료를 하던 주에 S는 너무 힘들어 했다.

마음 속으로 엄청 후회하고 반성했다. 괜히 치료했구나. 내 욕심이다. 그렇게.

그런데 기적처럼 복부팽만감이 좋아졌다. 퉁퉁 부은 배와 다리의 붓기가 빠졌다. 부어서 팽팽하던 살이 이제 말랑말랑해졌다. 

그렇지만 거기까지. 

합병증이 생겨서 더 이상 항암치료를 스케줄 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열이 나고 뱃속이 엉망이라 항생제를 쓰고 있었는데 항생제 때문인지 혈소판 감소증이 생겼다. 

그래서 가능성있는 약을 다 끊고 바꾸고 그렇게 몇일을 버텼다. 

다행히 혈소판 수치가 회복되었다.

암성 열인지 염증성 열인지 확실하지 않은 열이 계속 난다.

세번의 항암치료를 하고 시간이 꽤 지났지만 점점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다. 아무래도 항암치료를 하고 나니 기운이 더 빠지는 것 같다. 못 먹은지 세달째. 뼈만 앙상한 S.


항암제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계속 진행하기에 부담이 된다. 

객관적으로 항암치료를 하면 안되는 상황인데 내가 욕심을 낸 것이지. 

엄마도 

나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엄마도 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시지만 어떤 결정도 못 내리신다.


S랑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솔직하게 내 심정을, 내 판단을 얘기했다.

그리고 너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아무 말도 못한다.

내가 생각해도 환자가 대답하고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S야.

난 이제 항암치료 하고 싶지 않다.

아마 항암치료를 조금만 했는데도 반응이 꽤 좋았던 걸 보면

항암치료 하면 더 좋아질 거 같기는 해.

그런데 지금 뱃속의 병 상태가 많이 나빠서 

아주 많이 좋아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금 좋아지려고 많이 힘든 치료는 하고 싶지 않구나.

더 이상 항암치료를 안하겠다는 나의 결정을 받아들이는게

너로서 굉장히 힘든 일일거 같다.

인생 포기하는 것 같고...

그래서 나도 말하기 어려웠다.


근데 S야. 

그래도 그만 하자. 

남은 내 인생의 시간이 항암치료하면서 점점 더 힘든 시간으로 채워지게 될 것 같다. 

어제 진통제를 많이 올렸더니 안 아프고 괜찮지?

지금은 그냥 기운만 좀 없지 그럭저럭 괜찮잖아?

그러니까 이대로 있자. 

항암치료 하면 이만한 컨디션도 유지하기 어려울지 몰라. 까딱 잘못해서 폐렴오고 요로감염오고 그러면 순식간에 컨디션이 나빠지고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 난 그게 더 무섭고 싫다. 


S는 내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울해 했다. 엄마 몰래 우는 것 같았다. 눈가가 촉촉히 젖어있다. 


잘 잤니?



더 아픈데 없어?



마음 않좋아?


...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 

항암치료 안하면 다른 병원 가야하냐고 그랬다며?

다른 병원 안 가도 되.

항암치료 안 해도 되니까 그냥 여기 있자.

그러니까 안심하고 편안하게 잘 지내라. 알았지?



매일

회진 돌면서

S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힘들게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아픈 환자도 있는데

나는 건강하니까 다행이지

어찌 그런 마음을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S를 보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삶의 불공평하다,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나는 왜 고통스러운가, 그런 마음을 가질수가 없다.

S를 보면 난 그냥 잠자코 있어야 한다. 내 마음 속에서 널뛰는 온갖 종류의 아픈 감정들을 잠재워야 한다. 



오늘은 S 얼굴이 좀 편안해 보였다. 

그냥 있으라고 하니까 마음이 놓였나 보다. 


S야, 좀 괜찮아?

오늘은 좀 편안해 보이네.


선생님 괜찮아요.

안 아프고 좋아요. 


S와 엄마가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인생은

오늘 하루가

선물이다.


S에게는 이렇게 보내는 하루하루가 선물이다. 

선물같은 하루를 살 수 있도록 완화의료팀이 도와주고 있다. 


나도 하루를 선물로 받아들이고 살기로 한다. 

2013년은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삶과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더 노력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